‘오월이와 팔봉이, 그리고 나’ – 늙어가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
오월이와 팔봉이, 그리고 나
늙어가는 우리 가족의 아주 조용한 성장기
요즘 부쩍 이런 생각이 들어요.
우리 셋이,
비슷한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.
예전엔 그 아이들이 내 품에 안겨 잠들던 시간이 많았는데,
이제는 내가 그 아이들 곁에 조심스럽게 기대어 눕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.
늘 보살펴야 할 존재였던 아이들이
어느 순간부터 나의 안정이 되어주고 있더라고요.
팔봉이, 낯가림 심한 여름 (8월)에 만난 아이
팔봉이는 진짜 고양이스러운 고양이예요.
처음 데려왔을 땐,
내가 손만 내밀어도 뒤로 숨었어요.
믿고 다가오기까지 몇 년이 걸렸죠.
하지만 지금은요,
내가 소파에 앉으면
제일 먼저 다가와 옆구리에 등을 기대요.
가끔은 고개를 내 무릎에 얹고,
여기 괜찮지? 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기도 해요.
팔봉이는
예민하고 겁 많지만,
누군가를 한번 믿으면 아주 깊게 믿는 아이예요.
오월이, 사람을 좋아하는 하얀 발의 턱시도
오월이는 달라요.
사람을 너무 좋아하고,
문 열리는 소리만 들려도 인사하러 나오는 애정쟁이죠.
오월이의 특징은
나를 본다 는 거예요.
말없이 바라보는 그 눈에는
항상 뭔가 말하고 싶은 감정이 있어요.
그런 눈빛을 받으면
나도 모르게 알아, 나도 좋아해 하고 중얼거리게 돼요.
요즘은 좀 더 조용해졌어요.
낮잠 자는 시간이 늘었고,
창밖을 멍하니 보는 시간이 길어졌어요.
그래도 여전히
내가 눈 마주쳐주면 야옹 하고 대답해 줘요.
그게 고마워요.
그리고 나는, 이 아이들과 함께 나이 드는 집사
30년 넘게 편집실에 앉아
자막 하나, 장면 하나를 다듬으며
내 시간을 살아왔어요.
그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,
지금은 오월이랑 팔봉이의 하루가
내 하루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어요.
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
두 아이가 잘 잤는지 확인하고,
밤에 잘 자라고 인사하며
불을 끄는 게 나의 마지막 루틴이에요.
나는 이제
고양이의 집사가 아니라,
고양이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되었어요.
우리 셋은 서로를 닮아가고 있어요.
팔봉이의 예민함은 요즘 내 마음과 닮아 있어요.
작은 일에도 쉽게 피곤해지고,
혼자 있고 싶다가도
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워지는 날들이 있어요.
오월이의 느릿한 움직임은 내 걸음걸이랑 비슷해졌어요.
예전엔 휙휙 움직였는데,
요즘은 서두르지 않는 하루가 더 편하더라고요.
우린 그렇게 서로 닮아가고 있어요.
늙는다는 건,
단지 주름이 생기고 털이 빠지는 일이 아니라
속도가 같아지는 것 같아요.
그게 참 위로돼요.
우리가 함께 늙어간다는 것
이별을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.
하지만 매일매일 아이들과 함께 늙어가면서
나는 마지막 보다 지금 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되었어요.
그래서 요즘은
사진을 남기기보단
눈빛을 오래 바라봐요.
소리를 녹음하기보단
숨소리를 기억하려 해요.
기억을 위해서가 아니라,
지금 이 순간을 더 살기 위해서요.
오늘도 기록합니다
오월이가 창가에서 낮잠 자며 으르렁대는 소리를 들었고,
팔봉이는 오늘도 아침 간식 그릇을 발로 긁어댔다.
나는 오늘도, 두 아이와 함께 살아 있음을 느꼈다.
우리는 셋이서
매일을 조금씩 늙어가고 있어요.
그게 두렵기도 하지만,
그보다 더 고마워요.
이렇게 늙어갈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건,
인생에서 가장 따뜻한 축복이니까요.